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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前 MBC 보도국장 지규헌 "기자는 평생 기자여야 한다"

1997년 IMF가 시작되면서 평생기자를 외치던 수 많은 기자들이 천직이라던 기자직을 타의에 의해 빼앗기는 사상 최악의 대량 해고를 지켜보며, 소양강을 찾기도..


1996년 7월 15일 출범한 미국의 24시간 뉴스 채널 MSNBC는 1980년 첫 전파를 탄 CNN의 최대 약점인, 마켓식 방송의 맹적을 공략하며, 뉴스 토크쇼 스타일로 차별화를 선언했다. CNN 역시, 24시간 뉴스 채널의 선두 주자로서의 기두권을 지키기위해, 유명 앵커와 방송기자들을 대거 영입하며 MSNBC를 견제하는 발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지난 1999년 8월에 춘천시에 의해 설립된 '디지원 캐스트 인터넷 방송국' 역시, 중진급의 방송인을 영입하여 화제가 되었다.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처음으로 인터넷방송국을 설립한 춘천시(시장 배계섭)는 춘천MBC 보도국장을 지낸 지규헌(60) 상무를 영입하였다.

지규헌(60. 디지원 캐스트 인터넷 방송국) 상무는 주월한국군방송(민간방송요원 베트남 종군 국방부 3급을 문관 22개월) 일명 K.F.V.N이 개국, 종군기자로 방송에 입문한 후, 1969년 11월 영남TV(대구 MBC 전신) 개국요원 공채1기로 MBC맨이 되었다.

1970년 4월 1일 모친의 병간호를 위해 고향인 <춘천문화방송>으로 전근을 자청하면서 '보도국장, 편성국장, 기획심의실장, 방송제작국장, 상무이사 등 요직을 두루거치며 30여년을 춘천MBC에서 보낸 그를 스카웃한 <디지원 캐스트 인터넷 방송>은 곧 바로 재미를 보았다.

그해, 9월 10일부터 10월 30일까지 있었던 "강원도 국제박람회"에서 그의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되었기 때문이었다.

하루 5시간의 생방송을 강행하면서 30년 방송기자로서의 저력을 과시한 것이다. 지규헌 상무는 "평소 자신이 애착을 느꼈던 고향(강원도)을 세계에 알릴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라며 세계 60여개국의 '문화관광 엑스포'였으니, 규모나 내용면에서 가히 국제적 수준이었고, 강원도 속초를 우리나라 관광 1번지로 자리매김하는 강원도 최대의 이벤트라 자평했다. 그때 2개월간의 장기 생방송이 지 상무 자신의 방송 인생에서 "정말 원도 없고, 한도 없이 일했다" 라고 술회했다.

그런 열정 때문인지 그는 지난 1998년 3월 중순, 스스로 생(?)을 포기하기 위해서 소양강을 찾았던 일도 있었다. 지금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애환이 되살아나면 그는 몸서리를 친다.

1997년 IMF가 시작되면서 평생기자를 외치던 수 많은 기자들이 천직이라던 기자직을 타의에 의해 빼앗기는 사상 최악의 대량 해고가 그것이다.

그가 소속된 춘천 MBC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120명의 사원중 50명의 사원이 방송국에서 내쫓길 때 그가 지옥(?)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는 대량해고가 시행될 무렵, 국장에서 중역인 상무이사가 되면서 졸지에 저승사자가 되었다.

상무이사란 직함이 당연직 인사위원회 위원장이니 그는 50여명의 해고 사원들의 뒷모습을 보며 피눈물을 흘렸다. "그래, 내가 인맥을 다 동원해서라도 저들을 구제해야겠다..."

그러나,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온 1년 후, 1998년 3월 14일 오전 11시 그 역시 거리로 내몰렸다. 평생 기자는커녕, 남은 2년의 정년도 못채우고 쫓겨나는 신세가 한 없이 슬펐다. 피지도 못하고 떠나는 젊은 기자들의 비참한 모습을 상상하며 애써 자위해 보았고, 종군기자시절 '짜빈등작전'의 치열했던 용두 '2, 3호 작전'에 투입되어, 취재중 3번이나 죽을 뻔 했던 극박한 상황에 체면(?)을 걸어 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사이공에서의 4개월, 퀴논에서의 1년을 종군 취재하고, 1969년 9월 14일 30만톤급 초대형 군수송함 '엎슈오호'에 몸을 싣고 의기양양 귀국했던 그 때의 모습이 그립기까지 했다.

그 와중에 그는 재기의 기회를 얻었다. 1998년 방황의 그늘에서 시름하던 그에게 강원도지사가 추천하는 "언론중재위원"이란 직함이 날라 온 것을 시작으로 그해 8월 13일 배계섭 춘천시장으로부터 전국지방자치단체에서는 처음으로 인터넷방송을 설립하게 됐으니 같이 일해보자는 권유를 받은 것이다.

그는 흥분했다. "인간사에선 일생에 3번 기회가 있다 했는데, 2번은 이미 지나갔고, 그래도 한 번은 남아 있으리라는 기대속에 자위를 해왔는데 바로 이것이구나!"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설레임으로 시작했던 한(?)풀이가 현재의 '디지원 캐스트 인터넷 방송'이다. 지난 6월 27일부터 7월 2일까지 춘천에서 있었던 '코리아오픈 춘천국제태권도대회' 기간중에 보인 그의 열정은 "그가 겪은 2년간의 고뇌가 단순히 해직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편의 드라마였다. 이순의 노기자가 일주일 동안 꼬박 9시간의 생방송 기록을 세운 것이다.

아직은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인터넷 방송'이라 중계에 애로가 많지만, 그는 늘 직원들에게 강조하는 말이 있다. "우리는 세계 방송이라는 긍지를 갖고 일하자"는 것이다. 그렇다. "인터넷방송은 세계 방송이다." 클릭만 하면 국적을 불문하고 시청 할 수 있는 게 인터넷방송의 위력이다. "컴맹세대인 육순의 지규헌 상무가 MBC 에서의 화려한 경험을 인터넷방송에 접목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에도 이제 백발의 노기자들을 흔히 볼 수 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기대가 넘쳐났다.

그는 지인들로 부터 "죽을 때까지 방송만 할 꺼냐?"는 핀잔(?)을 들을때마다 스스로 맹세한다고 한다. "그래 기자는 평생 기자여야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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