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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제78회 순국선열의 날 계기 안중근의 동지, “조응순 선생” 등 독립유공자 66명 포상

[NBC-1TV 박승훈 기자]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17일 제78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러시아령 연해주에서 안중근의사와 함께 단지동맹을 맺고 한국의용군 결사대장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조응순(趙應順) 선생 등 66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포상한다고 밝혔다.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46명(독립장 1, 애국장 19, 애족장 26), 건국포장 9명, 대통령표창 11명이다.


훈․포장과 대통령표창은 제78회 순국선열의 날 중앙기념식장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기념식장에서 후손에게 수여된다.


이로써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분은 1949년 포상이 시작된 이래 건국훈장 10,795명, 건국포장 1,219명, 대통령표창 2,816명 등 총 14,830명에 이른다.


앞으로도 국가보훈처는 독립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 국가기록원, 지방자치단체, 문화원 등 관련기관과 사료수집 협업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고, 국내외 소장 자료를 지속적으로 수집함으로써 알려지지 않은 독립유공자를 발굴하는데 더욱 노력해나갈 계획이다.


제78회 순국선열의 날 포상자 중 주요 인물들의 독립운동 공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노령 연해주와 북만주 등지에서 종횡무진 활약한 안중근의 동지, 조응순 선생 


1908년 러시아령 연해주에서 안중근의사와 함께 단지동맹을 맺고 1921년 한국의용군 결사대 대장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조응순(趙應順) 선생께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일찍이 1908년 6월 연해주에서 전제익(全濟益) 의진에 가담해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연해주 연추에서 안중근의사 등과 단지동맹을 맺었다.


1917년 재중 일본공사 임권조(林權助)에게 참간장(斬奸狀 : 악인을 처단할 때 그 이유를 적는 글)을 보냈으며, 이듬해 예까쩨린부르크에서 국민회를 조직했다.


1920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독립단을 결성, 부단장으로 국내 진격작전에 참가했고, 같은 해 12월 치따에서 이동휘 등과 고려공산당 동아한인부 결성에 참여해 위원으로 활동했다.


1921년 9월 북만주 하얼빈에서 한국의용군 결사대를 결성한 후 대장으로 동지 규합과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활동에 참여했다.


같은 해 11월 상해에서 임시정부 인사와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하다 체포되어 징역 3년을 받았다.


선생의 활약은 의병으로 출발하여 국내와 노령, 만주일대를 넘나들며 독립단을 조직해 무장투쟁을 주도한 독립운동 지도자의 큰 길을 보여준다.
 

○ 의병으로 군자금 모집하다 체포되어 악형으로 순국한 최만년 선생


전라북도 임실과 순창 일대에서 의병으로 활약하다 순국한 최만년(崔萬年) 선생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전북 임실군 영계면 출신으로 순창군 아동면에서 정성현(鄭成賢)의 부하로 처음으로 의진에 참여하였고, 1909년 (음력) 2월 21일 임실군 주천면에서 김동구(金東九) 의진에 참여하여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징역 7년의 중형을 받았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 국가기록원에서 수집한 "합장부"(전주형무소, 1932)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수감된 지 3년 5개월여 만에 전주형무소 옥중에서 순국한 사실이 확인됨으로써 이루어졌다.


"합장부"는 일제하 형무소에 수감 중 사망한 사람들을 가매장·합장한 내용을 간단하게 기록한 문건이다. 선생의 옥중 순국 사실은 비전투 의병에게도 예외 없이 악형을 가하는 등 일제의 잔혹성을 보여준다.


○ 안성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홀연히 사라진 남현서 선생 

     
3․1운동 당시 대규모의 공세적인 시위로 유명한 경기도 안성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남현서(南玄西)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19년 4월 1일 경기도 안성에서 2천여 명의 주민을 규합하여 원곡면사무소, 양성 경찰관주재소, 양성우편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연설을 하며, 동 우편소와 일본 상인의 집에 방화하고 공격하는 등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선생은 일제 경찰의 검거를 피해 체포되지 않아 기소중지되었다.

     
안성군 양성면 만세운동은 공세적인 데다 주동급 인물의 상당수가 일제의 검거를 피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선생을 포함, 시위 주동자로 확인된 이덕순(李德順) 등 무려 9명이 ‘소재불명’으로 기소중지되었고, 이들 가운데 이덕순(1990년 애족장), 이근수(李根洙, 1990년 애족장), 이유석(李裕奭, 1990년 애국장) 선생 등이 서훈되었다.

    
선생의 아들(南基弘, 1913~1980)의 제적부에서 선생이 1944년 11월 5일 사망한 사실이 확인되어 포상하게 되었다.


○ 잔혹한 고문에 스러져간 민족해방의 청년투사, 김기석 선생 


서울에서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경북 예천에서 비밀결사 조직에 가담해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김기석(金己石) 선생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26년 11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 동맹휴업에 참여하다 퇴학처분을 받았다.


그 후 일본 도쿄로 건너가 신문배달과 공장 직공을 하다 고향인 경북 예천으로 귀향, 중앙일보 예천지국을 경영하면서 1932년 6월 한일청(韓一淸, 2009년 애국장) 등과 함께 비밀결사 농민조합 결성에 참여했다.


같은 해 11월 다시 비밀결사 예천무명당(醴泉無名黨)을 조직하여 선전부 책임을 담당, 동지를 모집하다 체포되어 징역 3년을 받았다.

특기할 만한 것은 선생이 대구형무소 수감 중 “피해망상” 증세를 보이고 “정신의 평형상태를 잃는” 등 이른바 ‘심신모약자(心神耗弱者)’로 분류되어 공주형무소로 긴급이송 필요성이 보고되었다는 사실이다.

선생은 출옥 후 1년 만에 30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는 일제의 고문과 악형이 얼마나 잔혹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 일제말기 식민통치의 심장부에서 독립운동에 가담한 손익극 선생

식민통치 말기 일본 도쿄유학 중 독립운동 비밀결사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손익극(孫翼極)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40년 9월 일본대학 제2상업학교 재학 중 학우 김기영(金基榮)의 권유로 항일 비밀조직에 참여해 활동하다 체포되어 징역 2년을 받았다.

    
일제는 이 비밀결사의 활동을 “재경 일대 제2상업 조선인 학생을 중심으로 한 민족공산주의그룹 사건”으로 명명하고 선생을 포함하여 관련자 4명을 검거, 투옥시켰다.

    
일제에 따르면 선생이 활약한 이 조직은 1940년 3월 이후 여러 차례 비밀 회합을 갖고 “조선인 일반에 항일의식을 고양”하며 “조선인 지원병을 독립을 위한 무력항쟁에 참여하게 하는 공작”을 추진하는 등 과감한 투쟁을 준비하였다.

    
엄혹한 일제 말기, 그것도 식민통치의 심장부에서 독립운동이 시들지 않고 치열하게 전개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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