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사회

12월의 독립운동가로 김치보 선생 선정

노인들의 의열투쟁을 이끈 독립운동 지도자

[NBC-1TV 박승훈 기자]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김치보(金致寶, 1859.9.17~1941.11.18.) 선생을 2017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선생은 평안남도 평양 출생으로 1919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노인동맹단을 조직하고 강우규를 국내에 결사대로 파견하여 새로 부임하는 조선총독 사이토 암살시도를 지원한 분이다.


1908년 경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한 후 덕창국이라는 한약방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으며 1909년 국민회 블라디보스토크 지방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청년돈의회 회장을 맡아 한인 교육활동에 힘을 쏟았다. 1910년에는 성명회의 병탄조약 원천무효 선언서에 서명하였고, 1911년 권업회에 참여하여 통신부장에 선임되었다.


1919년 2월 대한국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3․1운동 소식이 들려오자 연해주 일대에서 대규모 만세시위를 전개하였으며 1919년 3월 노인동맹단 단장으로 선출되었다. 노인동맹단은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총영사관에 독립요구서를 제출하였고, 9월 강우규를 국내에 결사대로 파견하여 남대문역 앞에서 새로 부임하는 조선총독 사이토에게 폭탄을 던져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22년 4월에 해삼위천도교교구장 고문자격으로 귀국하여 최시형의 아들 최동희를 만나 고려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선생의 행적은 1924년 3월까지 확인되나 이후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정부는 1996년 김치보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배너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