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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3월의 독립운동가로 김원벽 선생 선정

3․1 독립만세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끈 학생지도자

[NBC-1TV 김종우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김원벽 (金元壁, 1894. 5. 20.~1928. 4. 9.) 선생을 2018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선생은 황해도 은율군 이도면에서 장로교 목사 김태석의 외아들로 태어나 서울소재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기독교대학(연희전문학교)에 진학하였다.


선생은 1919년 1월 경성 시내 전문학교 학생대표 회동에 참석하며 국제 정세와 시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2월 초 독립운동에 참가할 것을 결심하였다.


윌슨 미국대통령이 제안한 민족자결주의와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백성들에게 퍼지자 민족대표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추진된다.


선생은 만세운동 추진을 위해 학생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고 각 중등학교 대표를 뽑아 학생들을 결속시켰으며, 독립선언서 운반과 배포 장소를 학교별로 정하였다. 아울러 학생대표를 중심으로 2차 만세시위를 3월 5일 남대문역(현재 서울역)에서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1일 수천 명의 학생과 일반인이 탑골공원에 모였으나, 민족대표들은 유혈충돌을 우려하여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하였다.


선생을 비롯한 학생대표는 민족대표가 탑골공원에 오지 않자 자체적으로 독립선언을 하고 남대문과 대한문 양쪽으로 행진하며 만세운동을 하였다. 급보를 받고 출동한 경찰과 헌병의 탄압이 있었으나 오후 늦게까지 시위를 계속 하였다.


3월 5일 오전 9시 남대문역 광장에서 다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선생은 강기덕 등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들고 약 1만여 명의 시위 군중을 이끌었다. 일제 경찰은 주모자인 선생에게 폭력을 행사하였고 이때 쇄골이 부러져 사는 동안 계속 고생하였다.


2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잡지 ‘신생활’과 일간지 시대일보 창간에 참여 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폐간되는 등 실패하자 낙향한 후 1928년 별세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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