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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안중근의사 순국 103주기 추모식, 26일 의사기념관에서

오후 6시부터는 숭모회와 중국․일본 측 행사 참가자가 모여 국제교류


[By NBC-1TV 박승훈 기자]중국 하얼빈역에서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하여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린 안중근의사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는 '안중근의사 순국 103주기 추모식'이 26일 오전 10시 서울시 중구 남산공원 내에 있는 (사)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안중근의사숭모회(이사장 안응모)주관으로 열린다.

이날 추모식에는 정양성 국가보훈처 차장, 독립운동 관련 단체장, 광복회원, 시민, 유족 등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안중근의사기념관장의「안중근의사 약전」봉독과 학생대표의「최후의 유언」봉독, 숭모회이사장의 추모식사, 국가보훈처 차장 및 광복회장의 추모사, 그리고 단국대 국악과 학생들의 추모공연과 제11회 안중근의사 추모 전국 글짓기대회 수상자의 헌시 낭독 및 수상자 시상, 헌화, 역사음악어린이합창단의 추모가 합창 순서로 진행된다.

오후 6시부터는 서울 세종호텔 3층 세종홀에서 숭모회와 중국․일본 측 행사 참가자가 모여 안 의사의 애국정신 및 평화사상 선양을 위한 국제친선 교류행사를 갖는다.

☞안중근의사 공적

안중근의사(1879~1910)는 황해도 신천 사람으로, 1905년 을사늑약의 소식을 듣고 중국 상해로 건너가 국권회복의 길을 강구 하였으며 부친상을 당하고 돌아와서는 재산을 기울여 삼흥(三興)학교․돈의(敦義)학교를 세워 인재교육에 힘썼다.

그러나 광무황제의 폐위, 군대의 해산 등 국권이 식민지 상태에 이르자 다시 해외로 나가 이범윤․김두성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1908년에는 의군장이 되어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함경북도로 진입하여 경흥․회령 등지에서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그 후 다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연추(煙秋) 등지를 왕래하면서 동지들을 만나 구국의 길을 강구하였고, 1909년 봄에는 김기열(金基烈)․백낙길(白樂吉)․박근식(朴根植) 등 동지들과 함께 손가락을 잘라 단지동맹을 결성하며 일사보국을 맹세하였다.

그리고 1909년 9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일제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하얼빈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 등과 함께 거사 계획을 세웠으며, 의거 당일(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기다리다 9시 30분경 기차에서 내려 러시아 군인들의 경례를 받으며 각국 영사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여 걸어가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향하여 총을 쏘아 3발을 명중시켰다.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될 때 러시아말로 “코레아우라(대한만세)”를 연호하였다.

1909년 11월 러시아 헌병대에서 여순(旅順)에 있는 일본 감옥으로 이송되어 심문과 재판을 받는 가운데에서도 일본의 부당한 침략행위를 공박하며 시정을 요구하였고, 조국의 완전 독립과 동양평화의 정착을 주장하였으며,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선고받은 후 1910년 3월 26일 순국하셨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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