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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공연중 부상당한 동춘서커스 곡예사 정명준 '끝내 숨져..'


지난 7월 8일 울산 공연 중에 다친 후, 5개월 동안 식물인간으로 생활했던 동춘서커스단(단장 박세환) 정명준(29 예명, 원표) 곡예사가 12월 13일 새벽 6시50분에 울산대학병원에서 사망했다.

유일한 직계 유족인 누나와 외삼촌, 이모 등이 지켜 본 가운데, 사망한 고 정명준 곡예사는 지난 7월 8일 울산공연 중, 지상 7미터 높이 상공의 외줄에서 고공 오트바이 묘기를 한 후, 오트바이를 공중에 정리하는 과정에서 떨어져 5개월 동안 혼수상태로 가료중이다가 끝내 숨졌다.

사망 후, 고인의 시신은 울산제일병원 영안실로 안치 되었다가 12월 15일 발인하여 울산화장터에서 화장된 후, 경남 양산시 매곡리에 소재한 '천불사' 납골당에 안치 되었다.

고 정명준 곡예사의 생전은 말 그대로 곡예인생 그 자체 였다. 홍콩배우 "원표"가 좋아 "예명"을 "원표"라 자정한 고인은 '인정 많은 곡예사, 정에 약한 곡예사'로 불렸다. 작년 5월, 동춘 국제부 중국팀이 합류했을때 부터 중국단원들을 보살피는 인정이 각별해서 중국 곡예사들과는 친 남매처럼 가깝게 지내기도 했다.

중국팀 방한 초, 하루에도 몇번씩 고장나는 중국팀의 공연도구를 보고 원표씨가 자청해 수리해주면서 자타가 공인하는 중국팀 도우미가 된 것이다. "남의 나라에 돈을 벌러 온 게 남의 일 같지 않아"서 도와줬다는 원표씨 자신도 독특한 과거를 지닌 곡예사 중의 한 사람 이었다.

1972년 서울 신내동에서 정종용 씨와 정말순 씨의 1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출생과 동시에 아버지와 생이별(?)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는 타고난 빠른 발로 단거리 달리기 금메달리스트를 꿈꾸며 서울자양중학교 육상선수로 선수생활을 했다.

어릴적 부터 빨리 달리는 물체만 보면 본능적으로 함께 뛰었다는 그는, 앞서가는 자동차를 봐도 뒤쫓아가고픈 충동이 생길정도로 승부근성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가정형편이 여의치 않아 상급 학교에 진학을 못 할 처지가 되었다. 비인기 종목인 육상 선수로 특기 장학생이 된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 이기에 가난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동료들이 고등학교에 입학 하면서 부터 그는 비 오는 날만 빼고는 무조건 한강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한강변을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다가 지치면 귀가하는게 그의 일과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운명의 시간을 맞이한다.



1987년 추석, 서울 남사동 한강 둔치에 설치중이던 서커스 가설극장을 지켜 본 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 극장이 완성되고 공연이 시작 되었을때, 그는 거금(?)의 입장료를 내고 관람했다.

운동 선수의 눈으로 본 서커스는 "고상한 운동" 그 자체였던 것이다. 육상이 모든 운동의 기본이자 장점이라 인지한 그는 서커서야말로 자신의 갈 길이라 확신했다. 그는 누이에게 어머니를 부탁한 후, 정든 집을 떠났다.

그리고, 서커스 책임자의 까다로운 면접 관문을 통과, 그 길로 서커스맨이 된 것이다. 입단 후, 그는 육상과는 또 다른 차원의 어려운 운동(?)을 뼈저리게 느끼며 곡예사로써의 수업을 받아야 했다.

곡예는 물론이고, 가설극장 설치와 해체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모든 것을 이루어 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공중비행을 시작으로 공중오트바이타기 등의 곡예는 물론이고, 극장내의 웬만한 전기나 조명, 음향기기 등도 그의 소관이 됐을 정도로 동춘에서 입지를 굳히던 그에게 "천청벽력"과 같은 비보가 날라온 것이다.

1998년 1월1일. 부평에서 '신정특별 공연'을 하고 있던 그에게 누이가 울먹이며 전화를 했다. "어머니가 신내동 자택에서 후두암으로 사망 했다"라고... 어려운 살림에 어린 남매를 키우시느라 고생만 하신 어머니, 서커스에서 탄 첫 월급으로 산 선물을 받으시고 흐느껴우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어른거려 무대 뒤에서 우박같은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어머니의 장례식을 끝내고 부터 그는 술에 의지 하면서 생을 허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무서울 만큼 성실했다. 그는 곡예와 엔지니어링, 건설, MC에 이르기까지 일인다역을 하는 동춘의 보배로 거듭난 것이다.

그래서 동춘의 박세환 단장이 그에게 월급 이외의 격려금을 별도로 줄 정도로 총애했다. 그런 그가 떠난 것이다. 지난 12월 15일 장례식이 있던 날, 광주에서 공연 중이던 동료 곡예사들이 고인의 마지막 길을 전송코자 울산으로 향하려고 했을때, 때이른 폭설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고 한다.

화려한 무대에서 뜨거운 박수를 받았던 정명준 곡예사... 그러나, "아직도 서커스를 보는 동정깔린 눈길이 안타깝다"던 그의 푸념어린 눈초리가 아른거린다. [NBC-1TV 이석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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