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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동춘서커스단 출신 스타 곡예사 박인종 추연정 늦은 화촉

1997년 7월 1일 포항에서 사실혼 시작한 17년만에 기각 결혼식


[NBC-1TV 이석아 기자]동춘서커스단 스타 곡예사 출신인 박인종(45. 세계문화콘텐츠공연기획 아트서커스) 상임이사가 16일 오후 후배 곡예스타 추연정(37)과 광주광역시 광산구청에서 화촉을 밝혔다.

선후배 및 동료 곡예사들과 공연 경영인들이 대거 참석한 결혼식은 신랑의 코믹한 연기(?)로 하객들이 폭소를 자아내는 등 축제 같은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

이들의 잔치에 곡예사 출신들이 남다른 관심을 보인 것은 이날 결혼식이 성실(16세) 수민(15) 남매를 둔 부모로 17년간 이어진 사실혼 관계 이기 때문... 지난 1996년부터 부부생활을 시작했지만 지방 순회공연을 다니면서 지각 화촉을 밝힌 것이다.

다음은 NBC-1TV에 예명 서정현으로 출연했던 내용박인종은 동춘서커스의 백미라 할 수 있는 공중비행의 리더였다. 지상 12m 높이의 그네에 거꾸로 매달려서 반대편에서 날아오는 곡예사들의 손을 잡은 후, 90도로 후진했다가 다시 그 탄력을 이용해서 곡예사가 놓았던 그네에 다시 보내주는 재주를 구사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였다.

혼자서 여러 명의 멤버를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체력소모는 상상을 초월한다고 한다.

1969년 7월 1일 광주에서 '노동'을 하던 박동식 씨의 1남6녀 중 넷째로 태어난 그는 부유하지는 못했지만 딸부자집의 '외아들'이라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 하면서 살았고, 어머니 김순심 씨의 아들사랑 또한 유별났다.



그러나 그가 15세가 되던 해 어느 가을 날. 본명 박인종이라는 이름 대신 예명 서정현으로 살아갈 운명의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1983년 늦가을. 광주 충장로(구 원호원 자리)에 흥겨운 나팔소리와 함께 대형천막이 세워졌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날의 곡예사 서정현이 있게 한 대양서커스단(단장 서재수 이공수)이다.

호기심을 품고 며칠간 대양서커스단 주위를 맴돌던 소년은 공연 중인 극장 안에 들어간 순간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아찔한 재주가 연출되고 상상도 할 수 없는 묘기가 펼쳐지는 것을 본 소년 박인종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만화영화에서 본 '스파이더맨'을 연상했다.

그날 이후, 그는 서커스극장을 맴돌면서 무엇인가(?) 고민을 시작했다. 결국 고민은 현실로 나타났고, 서커스 공연이 막을 내리고 그들이 떠나는 행렬틈에 박인종이 끼여 있었다. 가출해버린 것이다.

그날부터 대양서커스단 일원이 된 소년은 해병대 군기 버금간다는 서커스의 엄격한 규율 속에서 객지 생활의 쓴맛을 체험해야만 했다. 언젠가 자기에게 돌아올 관객들의 박수갈채를 상상하며 역경을 이겨 나가야 할 정도로 하루 하루가 고생의 연속이였다.

그 와중에도 그는 대양서커스단 공동단장이었던 서재수(현, 대우서커스단 사업부장) 씨의 수양아들이 되기도 했고 "서정현'이란 예명을 얻기도 했다. 외줄타기를 시작으로 곡예의 걸음마를 시작한 그는 타고난 체력과 눈썰미로 17세 때에는 간수(줄위에서 하는 묘기), 공중비행, 공중그네타기 등의 고난도 재주까지 소화해냈다.

그러나, 그의 곡예인생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단체생활이란 명분으로 행해지는 조직의 모순들이 감당키 어려웠던 것이다. 일단 자기의 책임을 다 한 후에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하늘(?) 같은 단장 앞에서도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1993년 가을, 공연 중 부모님 연배의 관객을 본 후, 갑자기 집생각이 났다. 물론 매일 그리워 한 집이었지만 성공하지 않으면 절대로 집을 찾지 않겠다는 그만의 자존심(?) 때문에 억눌러왔던 모든 것들이 무너진 것이다.



행복했던 6공주 틈의 1왕자(1남6녀 남매) 시절이 그리웠고, 부모님 생각 또한 간절했다. 그날 밤, 그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뒷날 곧 바로 고향집을 찾아갔다. 소년 때 가출한 후, 25세의 건장한 청년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10년 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아들을 본 가족들은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기쁨 반 슬픔 반'이라고 했던가? 그의 부친 박동식 씨는 그가 가출한 지 3년이 되던 해인 지난 1986년에 별세했다. 아버지의 사망 사실을 7년 후에야 전해들은 아들은 만감이 교차했다.

아버지 산소에 소주잔을 올린 후, 다시 집을 떠나오면서 그는 제 부모께도 불효한 놈이 남의 부모들에게 박수를 받아온 게 창피하다며 서커스를 떠났다. 위험직업 1호인 곡예사들의 장점은 어떠한 위험조건에서도 적응력이 뛰어나서 건설 업종에서는 어디를 가도 대접을 받는다는 것이다. 스키장 건설업체인 아연테크니칼(사장 김병수)에 취업한 그는 동료 홍창화, 창배 씨와 팀을 이루며 약 3년간 성실히 일했다.

그러나 '한번 무대에 선 사람은 영원히 무대를 못잊는다'는 어느 원로 곡예사의 말처럼 1997년 5월 다시 무대로 돌아왔다. 곡예사 서정현으로 돌아 온 그는 28세 때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1997년 7월 1일 포항에서 7살 연하의 곡예사 추연정 씨와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이로써 그는 가출 15년만에 기나긴 방황의 종지부를 찍었다. 추교현 씨와 김영자 씨의 1남 3녀중 2녀인 추연정(당시 24세)도 결혼 즉시 모범 가장으로 변신한 서정현을 보고 감동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던 불 같은 성격도 "절이 싫으면 중이 절을 떠난다"며 그날 바로 보따리를 꾸렸던 그의 모습은 총각시절의 "골동품(?)"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단호함을 단점으로 보지 않는 이들도 있다. TV 인간시대 등으로도 유명한 동춘의 김영희 곡예사는 오히려 그를 남자답게 처신하는 참신한 젊은이로 기억했다. 무대의 귀공자 박광환 씨도 그의 변한 모습에 경이로움을 나타냈다.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출발 했지만 이들의 신혼생활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찬사를 받기가 충분했다. 그러나 고민 거리가 생겼다. 결혼 1년만인 1998년 첫 딸 성실이를 낳은 후 이듬 해 1999년 아들 수민이 까지 얻은 서정현은 새로운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열악한 환경에서 네 식구가 생활하기가 힘겨웠던 것이다. 그렇다고 편리만 추구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서커스는 순회 공연을 하기 때문에 집체 조직의 특성상 혼자 떨어져 살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는 '궁여지책'으로 후생복지가 좋은 동춘서커스단으로의 이적을 도모했다. 1999년 초순, 결국 그는 대우서커스단을 떠난 후 그 해 5월 동춘이 인천 숭의동 공연을 할 때부터 동춘가족이 되었다.

극장 설치에 관한한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1인자이면서도 책임자의 지시대로만 작업을 하던 그에게 뜻밖의 행운이 찾아 온 것은 그해 7월 인천 연수동 공연 때였다.

히꾸다이(곡예주장. 공중비행을 할 때 중간 줄에 매달려서 마주편에서 날아오는 곡예사의 손을 잡았다가 놓아주는 사람)가 갑자기 동춘을 떠나 히꾸(공중비행)공연이 올 스톱되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서커스 공연에서 공중비행이 없다는 것은 반쪽 공연이나 다름이 없었다. 당시 국내에는 동춘을 포함해서 5개의 서커스단이 있었으나 히꾸다이(공중비행/주장)만큼은 스카웃이 쉽지가 않았다. 5-6명의 공중비행팀이 있어도 주장이 없으면 나머지는 허수아비나 다름이 없는 상황이었기에 다른 단체의 주장을 영입한다는 것은 다른 단체의 공연을 방해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전쟁이 영웅을 만든다"고 했던가... 실의에 빠진 박 단장 앞에 서정현이 나타났다. "단장님! 저가 해보겠습니다." "너 할 줄 아느냐?" "며칠 연습 해봤는데 할 만합니다." "며칠 연습 해보다니 무슨 말이냐?"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서정현의 제안은 곧 바로 현실화 되었다. 동춘 박세환 단장의 얼굴에 화색이 만연했다. "하루 30분씩 3일 연습하고 무대에 오르다니 역시 대단한 놈이다." 박 단장은 기자들 앞에서 구조물 설치에 관해서는 서정현을 따를 곡예사가 없다고 말해 온 터에 또 다른 서정현의 모습을 보고는 "어안이 벙벙 했다"고 한다.

그는 의정부 공연 때부터 무대에 섰다. 처음에는 '역체공'으로 인해 구토를 동반한 '몸살'까지 시달렸으나 포기할 그가 아니었다.

결국 그는 부천 공연 때부터 완숙한 재주를 구사했다. 하루 30분씩 단 3일(90분 정도) 연습만으로 본 공연 무대에 선 히꾸다이(공중비행/주장)는 서정현이 세계 최초라고 해도 과연이 아닌 것이다.

거꾸로 매달려 상대 곡예사들을 리더하는 그의 모습은 만화영화에 나오는 스파이더맨이 연상 되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그는 이번 달 말에 처갓집 식구들이 공연장 근처로 피서 온다며 민박을 수소문하러 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기자들에게 불만을 토로했던 말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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