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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10월의 독립운동가 권득수(權得洙)선생

경기, 강원 일대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순국


국가보훈처(처장 김정복)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을사늑약 직후 경기, 강원 일대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순국하신 의병장 권득수 선생(1877.10.4~1907.9.2)의 순국 100주년을 맞이하여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877년 경기도 양주군 남면에서 출생하여 파주군 적성에서 성장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일으켜 보겠다는 굳은 의지로 약관의 젊은 나이에 가산을 정리하여 군자금을 마련한 뒤 거사를 위해 양평으로 내려갔다. 이후 선생은 순국할 때까지 양평을 주 근거지로 삼아 경기도 양주와 포천, 그리고 강원도 홍천, 화천, 춘천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선생이 거느린 의병은 한때 400여 명에 이르는 대 부대로 성장하게 되었으며 강원도 일대에서 병력을 보강하여 세력이 크게 강화되던 무렵 선생은 민긍호 의병을 비롯한 주변지역 의진과 연합전선 구축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1907년 8월, 서울에 인접한 양평 일대에서 선생이 지휘하는 의병을 비롯하여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일제는 양평 의병을 탄압하기 위한 작전을 구상하게 되었고, 8월 23일부터 4일간에 양평 각지에서는 의병과 일본군 사이에 수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다.

선생은 일본군과의 결전에 앞서 400명의 휘하 의병을 용문산에 집결시켜 놓고 비장한 각오를 다지면서 “나라 없는 백성으로 왜놈의 노예가 되어 목숨을 부지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다면 우리의 후손들은 당당한 삶을 누릴 것이다.”라고 하며 최후의 결전을 독려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일본과의 수차에 걸쳐 접전을 벌이던 중 1907년 9월 2일 용문사 전투에서 31세의 나이로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적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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