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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 대통령 밀착취재

[방송]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 서거 제50주기 추모식 엄수

정의화 국회의장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박승춘 보훈처장, 전직 총리 등...


[NBC-1TV 이광윤 보도국장]조국의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초대 대통령으로서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인 이승만 박사 서거 50주기를 기리는 「건국 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 제50주기 추모식」이 17일 오후 2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엄수 되었다.

(사)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회장 박진)에서 주관한 이 날 행사에는 정의화 국회의장을 비롯해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김영우 수석대변인,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 이홍구 정원식 전 국무총리, 제재형 전 언론인회 회장, 각계인사, 유족, 독립운동 관련 단체장, 시민 등 8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의례, 추모 기도, 참석 내빈의 추모사, 분향, 유족 인사 등의 순으로 진행 됐다.

아래의 방송창을 클릭 하시면 17일 엄수된 제50주기 추도식 방송을 시청 하실 수 있습니다.



우남 이승만 박사 공적 우남 이승만 박사(1875. 3. 26.~1965. 7. 19.)는 황해도 평산에서 출생하였다. 1896년 서울에서 서재필의 지도로 협성회(協成會)를 조직하여 《협성회보(協成會報)》라는 주간신문을 발간하고, 주필이 되어 정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전개하였다.

또한 협성회보가 정부의 탄압으로 폐간되자 일간지인 《매일신문(每日新聞)》을 발행하여 주필로서 계속 활동하였다.

1898년 광무황제의 노여움을 사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박사는 “광무황제는 연령이 높으시니 황태자에게 자리를 내 주셔야 한다”라는 전단지를 배포하였다.

이로 인해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이 때 그의 정치 사상을 가장 잘 표현한 「독립정신」을 저술하여 국제 간의 외교와 외국인과 친선의 필요성, 낡은 사고 방식에서의 탈피, 국권 존중과 자유권을 소중히 할 것을 주장하였다.

1904년 11월 미국으로 건너 간 박사는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조지워싱턴 대학, 하버드 대학, 프린스턴 대학에서 각각 학사ㆍ석사ㆍ박사 학위를 받고 1910년 귀국하였고, 1912년 세계감리교총회 한국 대표로 임명되어 다시 미국으로 건너 가 하와이에 근거를 두고 《태평양잡지》, 《태평양주보》를 발간하였으며, 박용만ㆍ안창호와 협력하여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1919년 3ㆍ1운동이 일어나고 4월에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으며, 1921년 5월에는 워싱턴 군축회의, 1933년에는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의 침략성을 폭로하였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 구미위원장이던 박사는 국민의 단결을 호소하는 육성방송으로 희망과 용기를 북돋우고, 일본이 패망하자 1945년 10월 귀국하여 “뭉치고 엉키라,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못 사나니 다 같이 하나로 뭉치자”고 역설하였다.

1948년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정부에서는 박사의 공훈을 기려 194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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