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BC-1TV 특별기고 이윤서] 5월의 창덕궁 후원은 역사 속으로 걸어들어가 초록잎과 꽃들의 오케스트라를 만나는 특별한 공간이다.
지난 2004년, 25년 만에 일반인에게 공개된 이래 시간대별로 해설사와 함께 입장하도록 되어 있는 창덕궁 후원은 그만큼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매력적인 곳이다. 조선왕궁의 놀이와 잔치로 활용되었던 역사적인 장소이자 사계절 그림같이 아름다운 풍경은 우리에게 삶의 쉼표를 제공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러한 특별한 공간으로 들어서는 길은 입구부터 예사롭지 않다. 초록의 고목이 우거진 길을 에돌아 따라가면 눈앞에 신천지가 펼쳐진다. 천원지방(天元地方)의 성리학적 이념을 담고 있는 부용지가 나타나고 그 주변에는 연꽃이 활짝 핀 모양의 부용정, 주합루와 영화당이 자리하고 있다.
부용지 한가운데에 있는 소나무는 봄빛으로 더욱 푸르고 그 모습이 물에 비쳐 어른거리는데 주변의 건물과 자연이 어우러지는 비경은 감탄을 자아낸다. 이곳이 휴식과 학문적 용도로 쓰인 아름다운 공간임을 실감하게 된다.
주합루는 정조가 만든 2층 누각으로 아래층은 왕실 직속 도서관인 규장각, 위층은 열람실 겸 누마루로 되어 있다. 정조의 학문 사랑과 더불어 신하를 아끼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건물이다.
그 옆의 영화당에서는 왕이 입회하는 특별한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했다는데, 최근에는 배우 박보검이 드라마 촬영을 위해 오른 곳이라 하여 한 번 더 보게 되는 곳이다. 마루에 앉아 부용지를 내려다보면 한 눈에 주변의 경치가 들어온다.
부용지 일대는 자연스러운 주변의 산세를 끌어안고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연못이 조화를 이루어 계절마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람들을 반긴다.
부용지를 떠나 불로문을 통과하면 애련지가 나온다. 연꽃을 특히 좋아했던 숙종이 이 정자에 '애련'이라는 이름을 붙여 애련지가 되었다는 곳이다. 숙종은 '내 연꽃을 사랑함은 더러운 곳에 처하여도 맑고 깨끗하여 은연히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쉽게도 아직 연꽃의 계절이 아니라서 꽃을 볼 수는 없었다.
불로문 옆에는 의두합이라는 건물이 보인다. 이곳은 효명세자의 서재였던 곳으로 현재 '기오헌'이라는 현판이 붙은 의두합은 8칸짜리 단출한 서재로 단청도 없는 매우 소박한 건물이다. 건물도 사람을 닮았다면 효명세자의 인물됨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곳이다.
불로문 앞을 지나 더한층 후원의 안쪽으로 접어들면 왼쪽의 꺾인 곳에서 관람정과 연못을 만나게 된다. 연못을 중심으로 존덕정, 관람정, 폄우사, 승재정 등 다양한 형태의 정자들이 자리잡고 있다.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이 연못을 이루고 정자와 버드나무, 때죽나무, 쪽동백나무 등이 연못 주위로 멋진 풍광으로 이루고 있어 신선계에 들어온 느낌이 든다.
토종 철쭉은 지고 물철쭉이 한창인데 쪽동백나무는 조록조록 꽃봉오리를 맺고 있다. 은방울꽃은 수줍고 낮은 얼굴로 피어 있고 모란꽃은 봉오리가 몽실몽실 부풀어 오르며 햇살은 찬란하다. 소쇄원보다 규모는 작지만 분위기는 흡사한 곳으로, 한번 들어오면 멋진 풍광에 사로잡혀 떠나기 싫은 공간이다.
존덕정을 떠나 가파른 오솔길을 따라 산등성이에 오르면 시원한 북쪽의 조망이 한눈에 들어온다. 낮은 북쪽 계곡에 이르는 또 하나의 오솔길을 돌아들어서면 정자들과 옥류천을 만나게 된다.
다시 그곳을 나와 오던 길을 되돌아 나가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비탈길에는 애기똥풀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고 국수나무꽃, 보리수꽃이 한창이다. 초록 잎들이 피워내는 싱그러운 공기에 취해 내려오면 어느덧 연경당과 만난다.
이곳은 사대부 살림집을 본뜬 조선 후기 접견실로서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에게 존호를 올리는 의례를 행하기 위해 마련된 곳이다. 사대부 살림집을 본떠 왕의 사랑채와 왕비의 안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집이다. 툇마루에 앉아 5월의 햇살과 신록을 바라보면 삶의 고단함과 신산함은 다 잊혀지고 한가로움에 빠져든다.
후원에는 수령(樹齡) 3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 은행나무, 회화나무, 주목(朱木), 밤나무 및 측백나무와 매화나무, 향나무, 다래나무, 주엽나무 등을 비롯하여 다양한 나무들이 어우러져 있다.
후원의 나무들은 사시사철 늘 푸른 관상수가 아니라는 특징이 있다. 후원에는 봄이면 움트고 여름이면 잎이 푸르고 무성하며 가을이면 단풍들고 겨울이면 가지만 힘차게 남아 눈꽃을 피우는 그런 활엽수 계통의 나무들을 주로 심었던 것이다. 계절의 변화를 잘 드러내는 나무를 주로 심은 것은 자연과 조화되려는 우리 전통 정원의 구성원리를 구현한 것이다.
후원에는 이처럼 수목만이 자라고 있는 것은 아니고, 언덕이나 산등성이, 건물주변에 많은 종류의 꽃과 풀들이 있다. 후원의 식물들은 모두 경관을 고려하여 어떤 곳은 수풀을 우거지게 하고 어떤 곳은 큰 나무를 심어 주변 경관이 조화롭게 어우러지게 하였다.
또 구릉지는 화계를 두어 여기에 키가 낮은 관목과 화초를 심기도 하였다. 인공은 최소한으로 더해 가다듬고 여기에 어울리게 연못이나 화계를 가꾸어 자연스런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창덕궁 후원은 우리 전통 정원의 자존심이다.
창덕궁 후원은 자연을 넌지시 빌어다 사람이 깃들 공간을 만들었다. 어디를 보아도 억지스럽고 지나치게 인공적이며 과도한 기교를 부린 구석이 없다.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면서 소박한 삶을 영위하고자 했던 우리 조상들의 심성과 자연관이 그대로 녹아 있다.
후원은 지세에 맞게 적절한 자리에 건물을 지어, 국왕과 왕자들이 글을 읽고 학문을 연마하거나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했던 곳이었다. 무엇보다도 나무와 숲과 물을 보며 충분한 휴식을 취하여 다시 정사에 집중할 수 있는 기력을 회복시켜 주는 특별한 공간이었다.
느긋함과 넉넉함,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은 후원의 최대 매력이다. 더불어 이 공간에서 숨쉬었을 우리 선조들을 생각하며 역사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블랙홀이다. 이러한 매력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수양지이자 휴식처로서 고스란히 발산되고 있다. 그래서 더욱 소중한 곳이 바로 창덕궁 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