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처장 김정복)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일제의 궁성요배와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체포되어 옥중 순국한 주기철 선생의 탄신 110주년을 맞이하여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경남 창원에서 출생(1897.11.25~1944.4.21)하여 1916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하였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학업을 중단하고 귀향하여 교회의 집사로 신앙생활을 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창원군 웅천면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1920년 12월에는 경상남도 창원 웅천청년운동단(熊川靑年運動團다)의 대표로 조선청년연합회 창립총회에 참석하여 의사(議事)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1936년 장로교의 본산으로 불리우던 평양 산정현교회의 목사로 부임했다. 당시 평양은 기독교 학교에 대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전통 깊은 기독교 학교들이 폐교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또한 총독부에서는 1938년 2월 이른바 “기독교에 대한 지도 대책”이라는 것을 수립하고, 경찰력을 동원하여 학교와 학생들에게 뿐만 아니라 교회와 일반 기독교인들에게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갖은 탄압을 벌였다.
1938년 9월 일제의 강요와 탄압에 굴복하여 전국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하자 선생은 이에 정면으로 대항하여「일사각오(一死覺悟)」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고「조선 민족의 애국심을 말살하려는 일본의 악정을 규탄하자」고 신사참배 거부를 교도들에게 호소하다 일경에 피체되어 가혹한 고문과 집중적인 감시 등 탄압을 받게 되었다. 가석방된 후에도 조금도 뜻을 굽히지 않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설교를 계속하였으며, 1940년 7월 불경죄 및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또다시 피체되어 실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르다 1944년 4월 21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