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BC-1TV 김종우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채원개(1895.3.24~1974.2.16) 선생을 ’2020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청년시절 3․1운동을 시작으로 독립군과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을 거쳐 광복군에 이르기까지 무장투쟁의 긴 여정을 통해 조국의 독립에 헌신하였다. 무장으로서 강인한 기개를, 때로는 중재자로서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실천하였으며, 광복 이후에도 군에 투신하여 대한민국의 기초를 닦은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이었다.
선생은 평안남도 영원 출신으로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개신교 계열의 의명소학교를 졸업하고, 21세에 조선보병대에 입대하여 평생 걷게 되는 군인의 삶을 시작하였다. 이후 고향에서 3·1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었으나 탈옥하여 북만주로 이동하는 중에 유하현 삼원포에서 대한독립단 총단장인 조맹선을 만나 그의 부탁으로 대한독립단 군사교관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일본이 독립군 세력을 대대적으로 토벌하자 대한독립단 통임관구 지대장으로 열세인 병력과 물자로 일본군과 격돌하여 관통상을 입은 끝에 철수했다. 1921년 통의부 대표로 김창환·심용준 등과 함께 상해로 파견되어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였고, 이후 상해에서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하였다.
1923년 3월 한국노병회 특별회원에 선임되었고, 심용준과 함께 분열되는 임시정부의 단합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6월에는 낙양군관학교에서 기병과에 입학하여 체계적인 군사학을 배웠으며, 중국 군벌의 내전에도 참여하여 본격적인 실전 경험을 쌓았다.
1925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 주만 참의부 군무부장에 임명되어 정의부와 참의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만주로 건너가 직접 지도자들을 만나 갈등을 봉합하고 성공적으로 중재했다.
1927년 황포군관학교 교관으로서 제대로 된 군사양성 기관이 없이 무장투쟁하던 조선인들에게 체계적인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1934년에는 광동 주재 중국군에 복무하면서도 한국독립당 광동지부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도 지속적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광주에서 중국군으로 재직시 동산백원을 임시정부의 임시청사로 제공하고 아세아 여관을 임시정부 요인 및 가족들의 숙소로 이용하는 데 기여하는 등 임시정부를 측면으로 지원하였다.
1940년 광복군에 합류하여 참모처장, 1943년 총무처장등을 역임하며 후방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하였으나 1944년에는 광복군 제1지대장에 부임하여 전면에 나서 광복군을 지휘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광복군 제1지대를 이끌고 광복군으로 귀국하려 했으나, 미군정이 광복군의 입국을 거절하고 개인 자격으로 입국만을 허락하여 부대를 해체하여 부하들을 먼저 귀국 시킨 뒤 1946년 상하이에서 선편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후 육군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마친 뒤 제3연대 작전참모로 부임한 이후 제3여단장, 제2사단장을 역임했고 1949년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