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지방에서 민족의 동량을 키우기 위해 경학사(耕學社)를 세우고, 조국독립을 위해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신흥무관학교 전신)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한 友堂 이회영 선생의 순국 75주기 추모식이 16일(금) 오후 2시에 우당기념관(종로구 신교동)에서 友堂 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회장 홍일식) 주관으로 열린다.
이날 추모식은 약력보고, 국가보훈처장·광복회장·독립기념관장의 추모사, 옥태순 시인의 추모시 낭송 순으로 진행된다.
추모식에 이어 우당장학회(이사장 윤장순)에서는 순국 75주기를 맞아 독립유공자 후손 75명에 대한 장학금과, 대한독립운동총사 편찬위원회 김병기 박사와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신주백 박사에게 각각 연구비로 500만원씩 전달한다.
이회영 선생(1867.3.17~1932.11.17)은 일제에 국권이 침탈당하자 일신의 안락과 영화를 혼연히 버리시고 구국운동에 몸을 바치신 독립운동가로서 안창호·양기탁·박은식·신채호 선생 등과 함께 신민회 활동에 참여하였다.
1909년 국내 활동이 어렵게 되자 독립기지 건설과 독립군 양성을 위해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柳河縣三源堡鄒家街) 지방을 독립기지로 개척하였으며, 1910년 재산을 처분하고 6형제 40명의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10년 봄 추가장(鄒家莊)에 정착한 선생은 1912년에 이주 동포들을 위한 자치기구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에 기여하였으며, 1913년 국내로 들어와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고종황제를 해외로 망명시키고자 하였으나 고종 황제가 붕어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24년 4월 유자명·이을규·백정기 등과 함께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 「정의공보」를 간행하였으며, 1928년 7월 남경에서 한·중·일·필리핀·대만·안남 등 각국 아나키스트들이 모인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결성식장에서 「한국의 독립운동과 무정부주의운동」이라는 메시지를 보내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1931년 정해리·김광주·유산방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과 관계를 맺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그해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의열투쟁을 결의하고 항일투쟁에 진력하던 중 1932년 독립운동 세력 규합과 주만 일군사령관 암살 등을 목적으로 대련(大連)행 기선을 타고 만주로 향하다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11월 17일에 옥중에서 66세를 일기로 순국하셨다.
정부에서는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와 독립운동에 바친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