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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

9월의 6.25전쟁영웅 윌리엄 해밀턴 쇼 미 해군 대위


[NBC-1TV 박승훈 기자]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윌리엄 해밀턴 쇼(William Hamilton Shaw) 미 해군 대위를 9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미국인 선교사 부부의 아들로 평양에서 태어난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는 자신을 한국인이라 생각했고 한국을 조국으로 여겼다. 평양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쳐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갖추었으며 한국인 친구들도 많았다.

미 해군에 입대하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도 참전했던 쇼 대위는 1947년 전역 후, 늘 그리워하던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미 군정청 소속으로 ‘조선 해양경비대사관학교(현 해군사관학교의 전신)’에서 교관으로 근무하며 생도들을 가르쳤다.

교관으로 근무 중 학업에 뜻을 품은 쇼 대위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 과정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6·25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제2의 조국’인 한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겠다며 미 해군에 재 입대했다.

그는 한국에 있던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금 한국인들은 전쟁 속에서 자유를 지키려고 피 흘리고 있는데, 제가 흔쾌히 도우려 가지 않고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린 후 선교사로 가려 한다면, 그것은 제 양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라는 심경을 전하기도 했다.

한국어와 한국의 지리에 정통했던 쇼 대위는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최측근 보좌관인 해군정보장교로 임명돼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또 작전 완수 후에는 자원해 미 해병대 5연대에 배속되어 서울탈환작전에 직접 참전하였다.

1950년 9월 22일 아침, 적 후방 정찰을 위해 녹번리(현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에 접근하던 쇼 대위는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적 매복조의 공격을 받아 28세의 꽃다운 나이에 전사했다. 그가 전사하고 일주일 후 유엔군은 서울 탈환에 성공하였다.

전사하기 일주일 전, 쇼 대위는 인천상륙작전에 함께 참전했던 해군 이성호 중령(후에 제5대 해군참모총장 역임)과 나눈 대화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도 한국에서 태어났으니 한국 사람입니다. 내 조국에서 전쟁이 났는데 어떻게 마음 편하게 공부만 하겠습니까? 공부는 내 조국에 평화가 온 다음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평생 한국을 위해 봉사한 부모님과 함께 서울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장된 그의 묘비에는 “사람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그의 한국 사랑에 대한 사연을 알게 된 사람들이 뜻을 모아 1956년 그가 전사한 자리에 추모비가 세워졌고, 2010년에는 서울시 은평구 평화공원에 동상이 건립됐다.

해밀턴 쇼 대위는 우리 정부로부터 충무무공훈장을, 미국 정부로부터는 은성무공훈장을 각각 추서 받았으며, 2015년 6월 “호국영웅 우표”의 인물로도 선정되어 기념우표가 발행되었다. 관련 책으로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윌리엄 해밀턴 쇼” 가 발간된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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